[지난전시] 이효연 개인전 "Unknown Landscape"
등록일 : 2023-03-01   |   작성자 : 관리자   |   조회 : 908


이효연 개인전

"Unknown Landscape" 

 

 

작가노트


내 삶을 온전히 아는 사람은 나 밖에 없어요


이 효 연

 

“내 삶을 온전히 아는 사람은 나 밖에 없어요…”친구의 전시를 보러 갔다가 맥주를 한 잔 하는데 친구가 그렁그렁한 눈을 뜨고 해준 말이다. 사실 이 말은 오래전에 내가 그 친구에게 했던 말인데 친구가 소중히 기억했다가 나에게 돌려준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가장 많이 알고 기억한다. 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와 경험과 이야기를 담아 간다. 나는 어떤 부분을 조명하기도 하고 기억하거나 기록하기도 하며 삶을 영위해 간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볼 때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 혹은 더 섬세히 조명하는 것은 작업이기도 하고 동시에 삶이기도 하다. 오늘도 어느 전시장에서 기억과 분투하는 작업 앞에 잠시 서있었다.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이 공유한 타인과 일정부분 비슷한 기억을 갖는다는 얘기를 설치작업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기억이란 것 거기에 대해서라면 나는 정말 할 말이 많다. 이제는 더 이상 어색할 것도 없을 만큼 망각은 나의 벗이 되어버렸지만 기억이 망각이 되고 왜곡되고 굴절되고 사라지고 편집되는 과정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재밌는 것은 기억은 붙잡으려 할 때 바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다른 일에 열중하면 스르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점에 대해 나에게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은 드물 것이다. 기억은 나를 지탱하는 내 생각과 역사의 주춧돌이기도 하고 하나씩 지워지는 위시리스트와도 닮았다. 그 중에서도 기억의 맹점은 왜곡되고 굴절된다는 사실인데 거기서 변수를 모 른다는 점이다. 기억은 상수와 함께 움직이지 않는다. 이 때 왜곡이 일어나는 굴절정도와 시작되는 좌표를 우리는 몰라서 답답하다.

 

기억하는 한 나는 자유롭고 또한 집착한다. 집착은 괴로움의 대명사 중 하나다. 집착이 나로 하여금 작업하게 하지만 나를 놓아주지 않으니 집착할 밖에 도리가 없다. 오늘도 나는 가장 온전한 나를 위해 집착하고 작업한다. 이 때 질문 하나가 피어 오른다. 내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던 것들이 정말 진실이었을까? 사회가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정말 온당한 상식일까?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던 사회의 상식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상식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따라야 그것이 상식이 된다.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은 오해되지도 않고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회적 믿음에 대한 이야기일까? 그렇다.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기포가 올라오듯이 조금씩 품어왔던 의심들을 작업에 녹여내어 나자신과 우리에게 질문을 하려 한다. 기억과 기억 사이의 틈에 상상이라는 새로운 생명을 키우면 어떨까? 그러다 보면 상상은 다시 기억의 나무 언저리에 뿌리를 내리고 기억과 함께 자라나게 될 것이다.

나는 비현실적 풍경을 그려 왔다. 관객들은 여기가 어딘가요? 라며 자주 궁금해 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곳처럼 느껴져서 일 것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현실처럼 그럴 듯하게 그린다. 그래야 이야기가 성립되기 때문에 가능하면 사실적으로 재현하려 했다. 이때 관람자는 자주 등장하는 소재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식물들인데 열대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야자수, 사막에 사는 선인장, 추운 지방에서 볼 수 있는 눈 덥힌 나무와 같은 오브제 들이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이들이 날씨와 환경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을 그리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함께일 수 있다는 것을 이미지로 구현하는 것은 나의 하루하루에 위로가 된다. 그리고 서로는 서로를 유쾌하게 지지해 주면 좋겠다. 추위와 바람 앞에서 옷깃을 여미는 우리는 따뜻한 날에는 스스로 옷을 벗는다는 우화를 안다. 나는 목청을 돋워가며 주장하기 보다는 은근히 웃게 만드는 그런 태도가 좋다. 내겐 펜이 칼을 이기듯 웃음이 계몽을 이긴다는 믿음이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영어도 서툰 장자끄 상뻬가 뉴요커 라는 잡지의 표지그림을 긴 세월 그려온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 작은 오브제들은 거대한 풍경 속의 점 같은 존재이지만 그 존재가 웅장함이라는 화면에서 피식 하고 웃음을 짓게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림이 여유를 가지기를 바란다.

 

내 작업은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여러 정황들을 만들어 그림 안에 하려던 이야기를 여기저기 숨겨둔다. 가령 다른 대상에 비추어진 장면을 보면 반사되는 정도가 모두 다르다. 앞에 있는 사람은 옷색깔이 다르게 반사되고 멀리 있는 식물은 그것의 실루엣만 그림자처럼 반사된다. 또한 아무것도 자신을 반사하지 않는 것도 함께 있다. 

나는 시각예술의 미적 경험을 포기할 수가 없다. 바로 조화로움이다. 무얼 봐도 선과 색을 먼저 상상하고 그려내는 계산기가 머리와 눈에 장착된 것 같다. 나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것들은 나를 둘러싼 환경에서 반사되고 역 반사되며 서로를 반추한다고 믿는데, 그 영향을 주고받음이 그림 곳곳에 자연스럽게 숨겨져 있다. 모두는 그 존재에 이유가 있다는 것을 나는 표현하고 싶다.

 

다시 가던 길로 돌아와 여긴 도대체 어느 지역일까? 간단히 말하면 그런 곳은 없다. 그림이기 때문에 나는 자유롭게 같은 공간에 살 수 없는 것들을 한 공간에 그려 넣을 수 있었다. 그림 안에서는 표현 불가능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철옹성인 줄 알고 믿어왔던 것이 공중누각이라는 걸 알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일들은 때론 가혹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모두가 믿고 따르는 시간이 뉴욕의 하늘아래 서면 더는 기준이 아니게 된다. 이렇듯 우리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는 다른 기준이 적용됨을 알고 공간적 진실도 역으로 다른 차원으로 가면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사고의 유연함을 만나게 된다.

살아가는 일에 정답이 없듯이 질문도 하나가 아니다. 한번도 의심하지 않던 것들을 의심하는 일은 세상을 보다 풍성하게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진정한 강함은 무겁고 딱딱함이 아닌 가볍고 유연함에서 성취될 수 있는 가치라는 생각으로 나는 조금씩 온전해 간다. 온전한 만큼 숲이 자라고 자라난 숲이 믿음을 이루어 간다.

 

 숲의 믿음 5-함께, 아사캔버스에 유채, 130.3x193.9cm, 2022



다르고 서로 같은 숲, 아사캔버스에 유채, 112x162cm, 2021


숲의 믿음1, 아사캔버스에 유채, 40.9x53cm, 2022


숲의믿음 7-기원, 아사캔버스에 유채, 53x72.7cm, 2022


가지 않은 길, 아사캔버스에 유채, 60.6x72.7cm, 2022


그린민트, 아사캔버스에 유채, 45.5x53cm, 2021


초록의자. 아사캔버스에 유채, 53x45.4cm, 2021


그린그린, 나무패널에 유채, 53x45.5cm, 2021


모두의 숲, 아사캔버스에 돌가루와 유채, 116.7x91cm, 2022


Reflection 9, 아사캔버스에 유채, 80.3x116.7cm,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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